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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개요 간략 정리

by 향긋한커피 2021.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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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 7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역사에 대해서 잘 알아야 미래의 바보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데요. 사실 우리가 역사를 거의 교과서에서 시험때문에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웠어도 금방 잊어먹기 마련입니다. 평소엔 잘 몰랐더라도 이런 기념일이라도 한번씩 새겨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전쟁개요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27일 휴전까지 만3년 1개월간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양측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 넘나들고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 전투를 하였습니다.

 

6.25 전쟁은 민족전쟁이며 이념전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전쟁은 북한정권이 남북한 내부의 민족갈등 속에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고 구상한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정부를 타도하고 대신 통일된 공산주의국가 수립을 목표로 개시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준비에서 김일성 등 북한지도부는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과 긴밀하게 협의하였고 장비와 인력지원은 물론 전쟁개시 동의까지 받아내었습니다. 북한은 남침 직후 평화방송을 통해 남침사실을 은폐하면서 선전포고를 발표하였습니다.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던 한국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남침이 개시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최초 전황을 보고 받고 곧 긴급명령을 하달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강구하게 됩니다.

 

한국정부는 주한 미국대사 무초를 통해 시급히 필요한 탄약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하고 주미대사 장면을 통해 유엔에 지원을 호소합니다. 북한군은 속전속결로 남한을 공산통일 한다는 목표를 수립하였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상대적인 전력의 우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 시기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두어 소위 민주개혁을 강제하고 주민들을 전시 동원 체제하에 편입시켰습니다.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한 한국군과 유엔군은 9월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말, 전쟁발발 97일 만에 실지를 되찾고 전전현상을 회복하였습니다. 이어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부근에서는 한국군만을 운용해야 한다는 제한 사항마저 제거하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으로 진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엔군이 혜산진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공군이 대거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번 크게 바뀌게 됩니다. 중공군은 3차 전역 이후 한계점이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미국 역시 내부적으로 정전 압박을 받아 다른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유엔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밀리게 되자 1950년 말경부터 내부적으로 정전을 검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군과 '조·중연합군'은 1951년 6월 한반도문제를 더 이상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 협상에 의해 해결하고자 합니다.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정치적 타협으로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고 1951년 7월10일부터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였고 매 의제마다 장기간 설전을 벌이게 됩니다.

 

1953년 1월에 이르러 미국의 아이젠하워 신임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확전주장을 일축하고 공산군에 정치, 군사적 압력을 가중시키면서 휴전에 임하도록 입박하였습니다. 이 즈음 3월5일 스탈린의 사망이 발표되면서 휴전회담은 급진전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 심각한 정치적 대립을 겪었고, '이승만 제거계획'이라는 정치적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휴전협장을 묵인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군사경제원조, 한국군 증강 등의 약속을 받아내었습니다.

 

이와 같이 6.25전쟁 중에 진행되었던 휴전회담은 전쟁이 발발된 지 3년 1개월 만에 회담이 개시된 지 24개월 만에 북한군, 중공군, 유엔군의 미군 대표가 각각 휴전협정을 서명하면서 마무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전쟁이 생기게 된 배경은 무엇을까요?

 

 

 

전쟁배경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전후처리를 위한 카이로선언(1943.12.1), 포츠담선언(1945.7.26) 등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게 되자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새 역사의 꿈이 실현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종전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견해 차이는 한국문제에 예기치 않게 나타나게 됩니다. 즉 1945년 추축국이 무너지자 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힘의 공백상태가 조성되었고 독일과 일본의 통치로부터 독립된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지역으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였죠.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은 얄타회담(1945.2.11)에서 시작됩니다.

 

1945년 8월9일, 대일선전을 포고한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밀어닥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8월10일 일본은 연합국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수락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미국은 한반도에 38도선을 설정하여 그 이북지역은 소련군이, 그 이남지역은 미군이 진주하여 각각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의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인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전혀 내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측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였죠. 만주와 한반도를 겨냥한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8월13일 청진에, 22일 평양에 각각 도달하였고 8월말에는 이미 북한전역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노력 어떤 것이 필요한가

6.25전쟁을 돌이켜 보면 우리는 전쟁의 억지(정치학 용어. 자신이 힘을 행사할 수 있음을 나타내면서 적이 공격을 통해서 얻는 이익보다 보복으로 입게 되는 손해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일정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전략.)는 준비를 갖추고 있을 때만이 가능하며 한반도 통일도 평화적인 수단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6.25전쟁은 현재 우리에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많은 과제를 남겨놓았으며,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제시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민족적인 우선 과제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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